고전과 사상

전쟁이 멈추면 평화일까?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다시 읽는 이유

10월 24일 유엔의 날을 앞두고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읽습니다. 휴전과 평화, 공화정과 국가들의 연합, 낯선 사람을 맞는 권리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펼친 책과 깃펜이 놓인 서재 창문 너머로 여러 범선이 머무는 평온한 항구가 보이는 모습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상징적 일러스트입니다. 칸트의 실제 서재나 특정 항구를 복원한 그림이 아닙니다.

2026년 10월 24일 유엔의 날을 앞두고 평화를 기념한다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날은 1945년 유엔헌장이 발효된 일을 기억합니다. 국제기구가 생기기 훨씬 전인 1795년,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평화를 선한 소망보다 구체적인 조건의 문제로 다루었습니다. 총성이 멎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할까요?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휴식일 수도 있다

칸트는 전쟁을 다시 일으킬 구실을 남겨 둔 평화조약을 진정한 평화로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당장의 충돌을 멈추는 합의와 앞으로 충돌을 반복하지 않도록 관계를 바꾸는 일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휴전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즉시 싸움을 멈추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만 휴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지속적인 평화가 보장되었다는 결론까지 한 번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독자가 이 구별을 적용한다면 합의 뒤에 남은 조건을 물을 수 있습니다. 약속을 어겼을 때 다툼을 어떻게 해결할지, 상대의 의도를 확인할 통로가 있는지, 다시 무력을 사용할 유인이 줄었는지 같은 질문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점검 목록은 칸트의 원문을 오늘의 언어로 확장한 해석입니다.

전쟁의 비용을 치르는 사람이 결정에 참여한다면

첫 번째 확정조항은 각 국가의 시민적 체제가 공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시민의 자유, 공통 법에 대한 복종, 시민으로서의 평등을 논합니다. 전쟁의 부담을 자신이 져야 하는 시민들이 동의해야 한다면 결정을 더 신중히 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공화정은 오늘날 국명에 공화국이라는 말이 붙는지만 확인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권력이 어떤 원리로 구성되고 법을 만드는 권한과 집행하는 권한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가 중요합니다. 칸트가 비판한 직접민주주의를 오늘의 모든 민주적 제도와 같은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아테네 민주정에서 참여의 범위를 살핀 이야기와 함께 읽으면 정치체제의 이름보다 실제 참여 조건을 살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시대가 다른 제도를 같은 단어 하나로 평가하면 누가 결정하고 누가 비용을 치르는지 놓칠 수 있습니다.

국가들 위에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세울까

두 번째 확정조항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합을 다룹니다. 각각의 국가가 서로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일시적인 전쟁 하나를 끝내는 약속을 넘어 전쟁을 막는 관계를 만들려는 구상입니다.

칸트의 논의를 단일한 세계정부를 만들자는 제안으로만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국가들의 독립을 유지하는 연맹을 설명하며, 국가들이 하나의 공통 질서에 들어가는 이상과 현실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 사이의 긴장을 다룹니다.

유엔을 칸트의 설계도가 그대로 실현된 기관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유엔은 20세기 전쟁과 국제정치 속에서 구체적인 헌장과 제도를 갖추었습니다. 두 대상을 연결해 읽을 이유는 기원이 완전히 같아서가 아니라, 국가들이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를 구속할 규칙을 어떻게 만들지라는 문제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을 적으로 대하지 않을 권리

세 번째 확정조항의 환대는 친절한 마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평화롭게 다른 땅에 도착한 낯선 사람을 그 도착 자체만으로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권리의 논의입니다. 칸트는 이를 무조건 머물러 살 수 있는 권리와도 구별합니다.

낯선 사람의 방문, 교류와 정착의 조건을 나눈다는 점에서 이 논의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다만 당시의 세계시민적 권리 구상을 현대의 난민·이민 제도와 그대로 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의 구체적 권리는 별도의 제도와 규정 속에서 판단됩니다.

평화를 국가 정상들 사이의 약속으로만 보면 국경을 넘는 개인의 경험은 주변으로 밀리기 쉽습니다. 칸트의 세 번째 조항은 국가 내부, 국가 사이, 개인과 외국 사회의 관계를 함께 놓게 합니다. 이 세 층위 가운데 하나만 안정되어도 충분한지 물어보게 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이상과 제도의 한계를 함께 읽기

수에즈 위기 뒤 유엔 긴급군이 등장한 과정은 평화를 유지하려는 장치에도 동의와 정치적 조건이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철학적 원칙을 세우는 일과 실제 분쟁에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제도를 마련하는 일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습니다.

그 거리는 이상이 무의미하다는 증거만은 아닙니다. 무엇을 목표로 삼는지 알면 현재의 장치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디에서 부족한지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목적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제도의 실제 효과를 점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엔의 날을 앞두고 『영구평화론』을 읽는다면 평화를 완성된 성취보다 계속 마련해야 하는 조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전쟁을 결정하는지, 국가들이 어떤 약속에 묶이는지,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모두 그 조건에 들어갑니다. 조용한 하루를 오래 지속할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책을 덮은 뒤에도 남는 질문입니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자료

  1. United Nations Day (새 창)유엔 · 10월 24일: 1945년 유엔헌장 발효를 기념하는 유엔의 날
  2. Perpetual Peace: A Philosophical Essay (새 창)이마누엘 칸트 · M. Campbell Smith 번역 · Project Gutenberg · 예비조항 제1조, 제2절 도입, 확정조항 제1–3조; 번역자 서론과 칸트 본문을 구별
  3. Kant’s Social and Political Philosophy (새 창)Frederick Rauscher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8·9절: 국제관계와 세계시민적 권리

자료의 성격과 전승의 차이는 본문에서 구분해 설명합니다.

ONE THING TO REMEMBER

한 줄 정리

칸트에게 평화는 싸움이 잠시 멎은 상태를 넘어, 국가 내부의 권리와 국가 사이의 약속, 낯선 사람을 대하는 규칙을 함께 세워야 하는 과제였다.

강주찬 · 고전과 사상이 이야기의 오류 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