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창경궁은 왜 한때 동물원이 되었을까?

가을 창경궁 관람을 계기로 궁궐이 동물원과 유원지로 바뀐 과정을 살펴봅니다. 1909년 시설 개설과 1911년 개칭, 1983년 이름 회복은 각각 무엇을 뜻할까요?

가을 나무 사이의 조선 궁궐 전각과 돌마당을 현대의 관람객들이 바라보는 모습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일러스트입니다. 실제 유물이나 검증된 역사 복원도가 아닙니다.

2026년 가을, 창경궁 춘당지에서는 ‘물빛연화’가 10월 7일부터 11월 1일까지의 일정으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빛을 따라 궁궐을 걷는 경험은 오래된 장소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람들이 동물을 구경하고 밤 벚꽃놀이를 즐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불리게 된 과정을 알면, 관람 공간이 된다는 말의 서로 다른 의미가 드러납니다.

왕실 가족이 살던 궁궐

창경궁 자리에는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마련한 수강궁이 있었습니다. 이후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그 영역을 크게 넓히고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처음부터 시민의 휴식이나 동물 전시를 위해 만든 곳은 아니었습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을 이루며 주로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그렇다고 왕족이 잠만 자던 집은 아니었습니다. 왕실의 일상과 의례, 관계가 얽힌 장소였고, 사도세자의 비극처럼 궁궐의 공간과 분리할 수 없는 사건도 남아 있습니다.

이 성격을 먼저 이해해야 이후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궁궐 안에 동물 몇 마리가 추가된 정도가 아니라, 누가 들어오고 무엇을 보며 어떤 질서로 움직이는지가 달라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황실을 위한 시설이라는 명분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뒤, 순종의 거처는 창덕궁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무렵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박물관을 조성하는 계획이 추진되었습니다. 우리역사넷의 해설에 따르면 황실의 위락과 위엄을 위한 정원을 마련한다는 명분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황제가 원해서 만든 즐거운 시설로만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황제의 권한이 제약되고 일본의 간섭이 강해지던 상황에서 궁궐의 쓰임 자체가 바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계획을 이끌었고 어떤 정치적 조건에서 추진되었는지가 함께 검토되어야 합니다.

1909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이 개설되고 일반인 관람도 이루어졌습니다. 이때는 아직 1910년의 병합 이전입니다. 공원화를 모두 병합 뒤에 갑자기 시작된 사건으로 설명하면, 황실의 공간이 이미 그 전부터 재편되고 있었다는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1909년의 개설과 1911년의 개칭

시설을 열고 관람객을 받는 일과 궁궐의 이름을 바꾸는 일은 별개의 단계였습니다. 1911년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궁’이 ‘원’으로 바뀐 것은 간판의 한 글자를 고친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왕실의 생활 터전이 유원지로 자리매김하는 변화를 드러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해설은 이 과정에 조선 왕조의 권위를 낮추고, 근대적인 전시 시설을 통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미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동물원이라는 시설의 존재만으로 모든 의도를 읽을 수는 없지만, 당시의 권력 관계와 전각의 훼손을 빼고 편리한 공원이 생겼다고만 말할 수도 없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나란히 보면 공간의 정치성이 더욱 뚜렷합니다. 한 시대에는 궁궐을 다시 짓는 일이 왕권을 드러냈고, 다른 시대에는 궁궐을 관람 대상으로 바꾸는 일이 왕조의 위상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건물의 아름다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즐거운 구경과 훼손의 역사는 함께 남는다

1939년 4월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창경원의 밤 벚꽃놀이에 몰린 군중과 화려한 조명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꽃과 불빛, 다른 사람들을 보며 여가를 즐겼습니다. 이런 기록은 창경원이 실제 도시 생활 속에서 어떤 장소였는지 보여 줍니다.

그 경험이 즐거웠다는 사실과 궁궐의 공원화가 식민지 권력 아래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관람객 개인의 기억으로 훼손의 역사를 지울 수도, 훼손의 역사만으로 모든 방문자의 마음을 하나로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사료를 읽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문 기사는 그날의 인파와 분위기를 전하고, 후대의 연구는 그 풍경이 만들어진 제도와 권력을 해석합니다. 두 층위를 구분하면 기사 속 흥겨움을 곧바로 식민 지배에 대한 동의로 바꾸는 무리한 결론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되찾은 뒤에도 남은 질문

1983년 창경궁은 본래의 이름을 회복했고 복원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동물원 이전과 궁궐 정비도 뒤따랐습니다. 이 연도를 모든 복원이 하루에 끝난 시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명칭의 회복, 시설의 이전, 건축과 경관의 정비는 시간이 필요한 서로 다른 작업입니다.

복원된 궁궐을 본다는 것은 옛 왕실의 생활을 그대로 되풀이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늘의 창경궁은 시민에게 열린 문화유산입니다. 다만 무엇이 원래 있었고 무엇이 바뀌었으며 어떤 근거로 되살렸는지를 알아야, 현재의 풍경을 조선시대의 모습과 곧장 같다고 여기지 않게 됩니다.

오늘의 야간 문화행사와 과거의 야간 벚꽃놀이에는 사람들이 빛과 경관을 즐긴다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소를 운영하는 목적과 역사적 조건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창경궁의 전각을 바라보며 이름이 바뀌었던 시간을 떠올리는 일은, 눈앞의 아름다움을 어떤 역사 위에서 누리고 있는지 묻는 작은 출발점이 됩니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자료

  1. 2026년 하반기 창경궁 물빛연화 (새 창)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 행사 안내: 2026년 10월 7일~11월 1일, 창경궁 춘당지 일원
  2. 창경궁 소개·역사 (새 창)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 수강궁과 창경궁의 관계, 왕실 생활 공간, 1909·1911·1983년 연표
  3. 여가 생활, 창경원의 밤 벚꽃놀이 (새 창)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동아일보』 1939년 4월 18일 기사 및 해설: 유원지화의 명분·식민지적 성격·야간 관람

자료의 성격과 전승의 차이는 본문에서 구분해 설명합니다.

ONE THING TO REMEMBER

한 줄 정리

창경궁의 공원화는 황실의 공간을 식민지의 관람 공간으로 바꾼 과정이며, 이름 회복과 복원은 그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김주리 · 한국사 이야기이 이야기의 오류 제보

CONTINUE THE STORY

함께 읽으면 재미있는 이야기